양병일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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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병일은 전라남도 강진군 출신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다.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후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귀국 후 광주 변호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제2대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2년 재무부 장관 백두진의 재정 정책을 비판했다. 1962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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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일 (19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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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양병일 |
출생 | 1910년 |
사망 | 미상 |
본관 | 남원(南原) |
주요 경력 | 제5대 국회의원 제6대 국회의원 |
2. 생애
그는 전라남도강진군 출신으로,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2]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후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도쿄 변호사회에 소속되었다.[2] 귀국 후 광주 변호사회 회장, 조선변호사협회 전라남도 지부장, 대동청년단 광주 지단 부단장, 대한청년단 광주시 단장, 한국청년단 광주시 단장,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역임했다[2]。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강진군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0년 제5대 총선에서 같은 선거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1962년 9월 5일 성모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3]。
2. 1. 학력 및 변호사 활동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2] 1956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에서 행정학사 학위를 받았다.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2]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도쿄 변호사회에 소속되었으며, 귀국 후 광주 변호사회 회장, 조선변호사협회 전라남도 지부장을 역임했다.[2]2. 2. 정치 활동
양병일은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2]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후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도쿄 변호사회에 소속되었다.[2] 귀국 후에는 광주 변호사회 회장, 조선변호사협회 전라남도 지부장, 대동청년단 광주 지단 부단장, 대한청년단 광주시 단장, 한국청년단 광주시 단장,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2]1950년 제2대 총선에서는 전라남도 강진군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0년 제5대 총선에서는 같은 선거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
2. 3. 백두진 재정 정책 비판 논란
1952년 3월 7일 제12회 제28차 국회 본회의에서 재무부 장관 백두진을 향해 '오늘날의 재정 정책에 대해 상당한 비판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이적 재정'이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라는 취지로 규탄하여 물의를 빚었다.[4] 1953년 4월 29일 제15회 제64차 국회 본회의에서 앞서 언급한 건에 대해 "물의를 빚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하며, 그 평판을 다시 인용하여 연설했다.[2][4][5]2. 4. 사망
3. 역대 선거 결과
양병일은 1950년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남 강진군에 출마하여 9,099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1954년 총선에서는 10,410표를 얻었으나 낙선하였다. 1958년 총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15,042표를 얻었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총선에서는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11,362표를 얻어 재선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3-11-30
[2]
웹사이트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
2023-11-30
[3]
웹사이트
人事消息(인사소식)
https://newslibrary.[...]
2023-11-30
[4]
웹사이트
국회회의록-회의록검색
https://likms.assemb[...]
2023-12-01
[5]
웹사이트
記者席(기자석)
https://newslibrary.[...]
2023-12-01
[6]
뉴스
前民議員梁炳日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62-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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